[강의기록] 정본 C.S. 루이스 클래식 : 순전한 기독교 (docx, pptx)

2019-07-09
조회수 70



2015년 7월이 되고 지난 한 달 동안 서울지역에서는 메르스라는 친구 때문에 경영의 메르씨(MERCY)를 느끼지 못한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한참 그 시기에 매출이 50, 80% 줄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은 용수철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을 했었는데, 이럴 때는 올라갈 그 상황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 후 현재는 경기가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한 달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프지 않으시고, 이 자리에 앉아계신 것 자체가 메르씨(MERCY) 인 것 같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라는 단어가, MERE CHRISTIANITY 이 단어는, 잡티 하나 없는 단어, ‘순전한’이란 단어로 해석되곤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이론서라고도 불리웁니다. C.S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동들에게 예수님, 기독교를 잘 전하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구원, 신앙, 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도 보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도 이 작가의 작품이지요.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주제이구요, C.S루이스에게는 ‘작가’, ‘아동문학가’, ‘기독교 작가’ 등이라 불리웁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총 4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옳고 그름에 대한, 선과 악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주제입니다. 영국민들이 세계대전으로 인해 피폐한 상황,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본주의의 사회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는 것을 참고 하시구요, 이때 루이스는 미혼인 상태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가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이 무엇이냐, 

세 번째가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무엇이 옳으냐, 

마지막 네 번째가 하나님에 관한 신학이란 표현으로 제가 해보았습니다. 용감하게도 삼위일체나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구요, 쉽게 풀어주셨습니다.


‘진리는 인간에게 합의를 청하지 않는다’ 이 곳에 나오는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이 예문을 통해 이 문장이 도출되어 집니다.

우리가 어떤 문이 참된 문인지 묻는 것입니다.

어떤 문이 참된 문인지 묻는 것입니다. 페인트칠이나 판자가 가장 마음에 드는 문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이 물어야 할 곳은 “이 곳의 예배 스타일을 내가 좋아하는가?” 가 아니라 “이 교리들은 참된가? 여기에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 이 문을 두드리길 꺼리는 것은 나의 교만이나 단순한 취향 때문이거나 특정 문지기를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은 아닌가?” 입니다.


이 뜻은 내가 기독교에 대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텐데, 이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참과 거짓의 문제라고 말하며 문을 여는 것이죠. 

제가 지구촌교회 간사님이 지은 책인데, 제가 전도하고 싶은데 마음의 문을 못 여시는 분에게 전해주는 책인데요, 어느 추운 날 한 사람이 넓은 호숫가에 나왔는데, 이 사람은 호수의 얼음이 얇아서 건너지 않을 수도 있고 두껍다고 건널 수도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호수에 얼음이 얼고 안 얼었냐 보다 그 전날의 온도가 어떠하냐가 좌우한다. 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중간중간에, 하나님이란 존재는 당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데,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자체가 모순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연법이라고도 불리 우죠. 예를 들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이야기 하면 이 자연의 법칙을 학습의 결과라고 하거나 다양한 주장을 하는데, 자연법은 본능의 발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위험에 처한 본능이 있을 때, 도우고자 하는 본능과 내가 먼저 피하려는 본능인데, 그 외의 3의 본능이 존재하는데, 그 것은 본능을 초월한 ‘제 3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인간의 본능을 뛰어 넘는다고 합니다.


루이스의 작품에서는 은유적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부모가 자녀가 무언가를 물어보았을 때, 바다를 한번도 보지 못한 아이가 아빠에게 물어본다면, 아빠가, “저 강이 학교 운동장 만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100개가 붙어 있는 것이 바다야” 처럼 설명해줍니다. 도덕률이 우리가 연주해야 할 곡조라면, 본능은 피아노 건반이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자연법은 교육에 의한 사회적 관습을 초월하려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개혁가다 창조가다” 라는 표현들을 문명과 상관없이 쓰는데, 그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데 그 기준은 사회적 합의와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창조적 진화에 관련된 이야기 인데요, 로마 가톡릭에서 진화론에 대한 평가를 한 적이 있죠. 이슈가 된 적이 있는데, 진화론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아직 바꾸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루이스는 미국 복음주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그래도 루이스는 가장 공통의 입장에서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창조적 진화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 물질의 정신적 힘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루이스는 비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따르는 감정적 위안을 듬뿍 제공하면서, 믿음에 따라오는 덜 유쾌한 결과물들은 면제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이 근거에 동의를 하는 입장입니다만, 얼마 전 우리나라에 ‘루시’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한 여배우인데, 자기 몸에 우연치 않은 계기에 의해 유전자 변형을 겪고 뇌 사용이 100%까지 올라간다는 영화였습니다. 이 후반부에 뇌 사용이 50% 올라가니까 사람을 조종하고 70% 올라가니까 시간을 조종해요. 나아가 이 영화에서는 우주까지 올라갑니다. 공룡이 다니는 시대가 보이고, 우주가 생성되는 것까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현대로 돌아와 모든 것을 해탈합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베이스는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을 신적 위치에 올려두고, 현재 우주에서 ‘내’가 최고임을 말해줍니다. 내가 사는 것과 주는 것을 내가 결정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내가 결정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종교적 감동은 누리면서 그 대가는 치르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의미의 주제와 과학의 주제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과학의 주제는 ‘무엇을 보았는가, 결과가 어떤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의미에 대한 부분은 의문으로 남는 다는 겁니다.


선과 악의 문제를 본다면, 육은 악하기 때문에, 육은 뭘 해도 상관없다는 쾌락주의로도 가곤 합니다만, 악은 선이 부패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맥락에서 아인슈타인의 영상을 한 번 보고 가도록 합시다.


(영상 상영)

루이스가 이 책에서도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표현이 아니라, 악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악은 악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악은 선이 없는 상태가 악임으로 창조, 타락, 구속은 모든 것이 선한데. 그 선함으로부터 구별되어진 상태라는 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도 이런 논쟁도 있고 말들이 많은데, 이미 루이스가 답을 다 해준 상태이죠.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에 의해서, ‘권위 있는 위치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한가지 일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에 부합되면서 부합되지 않는 상태를 알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런 예를 듭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오늘 밤부터는 너희 공부방을 정리해 주지 않을 거야. 이젠 너희도 스스로 방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지각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공부방에 가 보니 곰 인형이며 잉크며 불어 문법책이 온통 어질러져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방을 잘 정리하길 더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아이들에게 방을 어지럽힐 수 있는 자유를 준 것 역시 어머니의 뜻입니다.


아주 저는 효과적인 비유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은 자유의지! 

 

저도 이제 자녀를 키우지만, 자녀가 자발적으로 ‘아빠 사랑해요’ 라며 선물을 주기를 원하지, 어느 권위 있는 사람이라면, 자체적으로 나와 연합하기 원하지, 장난감 병정처럼 다가오길 원하지 않죠.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기쁨과 사랑이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는데,1. 분별력, 2. 좋은 꿈 3. 유다 민족의 사건

제가 인도를 갔는데 ‘켈리 신전’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염소의 피를 뿌리는 제사를 드리더라구요,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치루던데, 결국에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달릴 수 있는 자동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진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그를 온전한 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든, 아니든’의 선택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문제는 오른쪽인데요, 회개의 필요성을 주는 악함이 회개의 장애물이고, 자체적 회개는 불가능 하고, 회개란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이라 합니다. 결국에 회개는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행동은 꿋꿋함과, 분별력, 자제, 절제 4가지라고 말합니다.


회개나 선을 막는 진짜 장애물은, 첫 번째는 호화로운 생활이나, 욕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더 큰 것은 자부심입니다. 긍정적 의미의 자부심이란 단어를 우리가 씁니다만, 이 책에서는 교만이라는 말로 해석되어집니다.

그런 것 있죠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이 마음이 자선을 베푸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루이스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나 자선 때문에 못하는 정도 라는 기준이 진짜 자선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선의 최대 기준은 억지로 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니멈은 인색함인 것 같고 그 사이 어딘가가 즐기는 자선이라 생각되어집니다.


기독교 사회는 우리 대다수가 진정으로 원하기 전에는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되뇌일 수 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있어서, 정신분석과 도덕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시 영국사회에서는 이 치료들이 흥행했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세 남자 중, 평범한 두려움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남자는 병적 두려움을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c라는 남자는 가능한 위험을 피하는 도덕적 선택을 했다고 할 경우 즉 b와 c의 병사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치료를 통해 치료되는 것 외에 도덕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치료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악은 자기 스스로 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지요. 그러므로 심리적인 병이라고 설명하기엔 도덕의 문제가 해결되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식욕이라는 것은 건강과 체력을 위해 존재하고 성욕이라는 것은 가정과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데, 그런데 음식을 삶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그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도 욕구에 대한 자제심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강하게 발동되는 욕구가 모두 건강하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참석하는 독선가가 있고 매춘부가 있다면, 독선가가 더 악하다고 봅니다.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험담을 즐기는 것 권력을 즐기는 것이 성도덕 보다 가장 무거운 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쾌락의 6가지를 볼 때에, 책에서는 4가지 이지만 해석상 6가지로 나누어 보았지만, 미루는 경향과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것들 험담하는 것들 모두 해당 되어집니다.

결혼에 대해 나오는 데요 식욕과 비교를 합니다. 마치 사람이 씹기만 하고 뱉으면 정상적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식욕은 삼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결혼도 사랑만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하는 사랑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크리스천 경영자에게 있어서 가치경영의 대 전제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로 가치경영을 말하는데요, 사업하는 목적이 뭡니까? 했을 때, 우리의 전제가 문답인데요. 여기에서도 용서라는 문제를 루이스는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몇 년 후, 제가 평생 동안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미워한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죠 저도 제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하고 사랑하거든요, 이렇듯 타인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용서라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아까 말씀 드렸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스승들이 궁극적인 악이며 성적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도 이 악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본성상 경쟁에서 오는 것을 루이스는 즉 교만, 자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의 증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자신이 신앙생활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 진다면… 두 번째 즐겁게 해주고 싶은 대상을 즐겁게 해주고… “나도 참 굉장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연회장에서 거물급 인사를 보고 불쾌감을 느낄 때 마지막으로 비교의식을 갖는 것 이런 것들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제가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어릴 적부터 술 담배를 안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만족을 누리고 있다는 것,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교회에서 섬기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참, 겸손이 힘듭니다.


위대한 사랑의 비밀이 있는데, 대 전제는 사랑의 행동을 하라! 입니다. 이 책에서는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13절>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 전서 13장 1~13절은 사랑의 의지에 대해 나옵니다. 이렇게 쭉 내려가보면 7절,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그것은 사랑은 의지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은 ‘덤’이 된다. 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지향하면 모두 잃게 된다’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은 다음 세상에서 채워지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채워짐이 있다는 것으로 크리스천들이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래, 감정과 느낌 같은 것들이 아니고, 받아들인 것을 고수하는 것, 그의 의도에 맞는 피조물이 되는 것, 일정한 방식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4장에서는 책을 편집하면서 추가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 장을 시작하기 전에, 어렵다면 읽지 마라, 그러나 관심이 있다면 읽어라 하며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바위연구자가 바위를 연구한다고 하면, 절대적인 주도성에 의한 것이다. 토끼를 연구한다고 할 때는 연구자의 절반의 주도성이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구자가 학자를 연구한다고 한다면 이를 돌을 다루듯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신뢰와 자기노출이 중요하게 되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연구한다는 것은 연구대상의 주도성이 연구자보다 올라가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평면이 입체를 인식 못하고 선이 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도 그렇지요,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인터스텔라와 같이 중력에 의한 공간의 뒤틀림이 자세히 표현되어져 있는데요, 여러분 시간이 되시면, 6일간의 창조론을 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창조과학자들의 설명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라는 것입니다.


소설 안에서는 “작가가 소설 속에서 ‘메리는 책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는 문장을 2-3시간 쓸 수 있지만 소설 속에서는 작가의 시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듯 동시의 사건이지만, 작가가 아주 짧은 시간에 ‘일년이 지났다’라고 기록할 수 있지만, 작가가 이 문장을 기록하는 것이 3초가 걸리는지 3시간이 걸리는지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을 우리는 읽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 다음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것인데요,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겠고 전체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겠지요, “ 악마는 우리가 어느 한쪽을 특별히 더 싫어하게 만들어서 그 반대쪽으로 조금씩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맙시다. 우리는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그릇된 두 생각 사이에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중 하나에 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취하고 싶기 마련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어느 쪽에 치우치는 것은 다른 쪽을 멸시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루이스의 이야기와 앞서 말하셨던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이오스’로 살아간다고 해도,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담고 있지만, 오늘날 직원들과 쉽게 읽기는 어려워 보이구요, 회사 내에 동역자나 신앙적 리더가 있다면 한 챕터씩 공부하면서 읽으면 좋겠다 생각되어 지구요, 서머리를 참고하시면서 공부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해당 도서는 아래 링크를 통해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http://bitly.kr/vvASiQ

0 0

인사이트 BEST